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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행 열차 쿠궁 쿠궁. 쿠궁 쿠궁. 마치 전철 속에 있는 것 같다. 규칙적으로 느껴지는 진동과 소리. 그리고 왠지 모르게 불편한 듯한 느낌. 마치 전철 의자 위에 앉아 잠들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던 여자는 결국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국의 열차는 대부분 좌석 수십여개가 늘어서있는 좌석차이며 서양, 특히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박스석 같은 열차는 보기도 드물 뿐더러 타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었다. 그런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번, 그리고 그런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 계기가 전혀 기억이 안난다는 점에서 또 한번, 자신의 옆에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경악한 여자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고 뺨을 꼬집고는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한국에서는 희귀한 박스석 열차이며, 창문이든 객석 문의 유리든 간에 어렴풋이 하얀 서리가 껴 있다는 점만이 확실해질 뿐이었다. 여자는 잠시 의자에 몸을 깊숙히 기대 생각에 잠겼다. 이 열차에 타기 전의 기억은 어렴풋이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랜만의 동창회였다. 졸업한 지는 7년이 지났지만 이제까지 동창회는 단 두 번 뿐이었다. 그리고 그 두 번도 여자와 친했던 친구 몇몇과 만나는, 동창회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사람 수가 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이번에는 왠일인지 반장이었던 녀석이 물어물어 그녀에게 연락해 온 것이었다. 반 아이들 거의 모두가 모일거라는 말에 여자는 조금 망설이긴 했다. 여자의 평소 신조가 좋은게 좋은 거라는 적당주의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당시 모든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진 않았다는 이유도 있긴 했지만. 그러나 여자의 남자친구가 가는 것이 좋을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남자친구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려고 기차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나 한국 떠난지 2년 조금 안됬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2년 만에 박스석 열차가 생길리는 없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다시 졸음이 밀려오는 듯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여러번 감았다 떴지만 몰려오는 졸음은 그녀의 노력을 가볍게 무시하며 그녀를 다시 수면의 세계로 인도했다. 얼마나 잠에 빠져 있었을까. 멍한 기분으로 의자에 누워있던 그녀의 귀에, 객실을 막 지나쳐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잠시 멍한 기분에 누워있던 그녀는 곧 벌떡 일어났다. '사람이 있다?!' 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벌컥 연 여자는 통로를 훓어 보았다. 어둑어둑한 통로는 군데군데 오렌지 빛 백열등만 켜져 있어 사물을 알아보는데 에로사항이 많았지만 그녀의 눈은 왼쪽 통로 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기요!" 그녀는 급히 통로 왼쪽으로 뛰쳐나갔다.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격한 행동이 힘든 정장과 하이힐을 신긴 했지만, 인간의 신체구조상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이 빠르기 마련인데도 그녀 앞에서 걷는 사람의 걸음 속도는 걸음만이라면 마치 자메이카 출신의 육상 선수를 능가하는 빠르기로 걷는 듯 문이 닫히는 것 외에는 뒷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기차 안에서 뛰느라 숨이 차는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는 그녀는, 숨이 찬 데다가 다시 몰려오는 졸음 때문인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을 느꼈다. 그 때, 그녀의 발이 꼬이면서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악!" "어라? 읏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 그녀를 바로 세웠다. 숨을 몰아쉰 여자가 앞을 바라보았다. 짙은 감색의 바탕에, 금색 실로 테두리를 감싼 모자를 쓰고, 역시 짙은 감색 바탕에 황금빛 단추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제복을 입은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은 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아, 네. 괜찮아요." 뛰느라 엉망이 된 옷과 머리를 얼추 정돈하고는 여자는 승무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이 기차 어디로 가는 건가요?" "사촌행 열차입니다만…? 설마 잘못 타신 건가요?" "사촌행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를 보던 승무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통로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역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있습니다. 저 쪽에서 자세한 이야기 좀 해주시겠습니까?" 의자 위에 앉은 여자가 조금 추운 듯 몸을 움츠렸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식당칸인듯 접시들과 컵, 그리고 테이블마다 세팅되어있는 넵킨과 포크, 나이프 등의 물건들이 보였다. 잠시 후, 승무원이 김이 폴폴나는 컵 하나를 들고 그녀 맞은 편에 앉아 컵을 그녀 앞으로 밀었다.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여자가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컵 안의 액체를 마셨다. 핫 초코인듯 달콤한 맛이 입 안에 펴졌다. 목구멍으로 엄기자 따듯한 온기가 온 몸에 퍼지면서 졸음기가 달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도 승무원이 웃으며 말했다. "맛있나요?" "아, 예. 좋네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다들 열차 탑승하신 다음에 역에 도착할 때까지 주무시는 터라." 승무원의 말에 생각났다는 듯 여자가 물었다. "그나저나, 사촌역은 어디 있는 역이죠?" "강원도하고 경기도의 경계지역이애요. 서울 간다고 하셨죠?" "네." "아마 급행을 타게 되면 금방일겁니다." 승무원의 미소에 여자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여자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불안한 듯한 느낌의 표정을 지은 여자에게 승무원이 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 저, 이런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전 이 열차를 단 키억이 없어요." "잘못 타셔서 그런게 아닐까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전 애초에 열차를 탄 기억이 없어요." 불안한 듯한 여자의 말에 승무원은 여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손님의 기억을 더듬어봐요. 차례차례, 천천히. 가장 최근 것부터 기억해보시겠어요?" "…음…." 여자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승무원은 그런 여자를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간의 적막 후, 여자는 눈을 감은 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 대합실에서 남자친구와 열차를 기다리던 게 기억나요. 잠시 졸려서 남자친구 어깨에 기대서 졸고 있었는데…." "남자친구와 어딜 가려고 했나요?" 조용한 가운데, 규칙적인 열차의 진동과 함께 차분한 목소리로 승무원이 물었다. 마치 최면 중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열차에 타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자는 순순히 대답했다. "…동창회에 가려고요. 오랜만에 반 아이들이 다 모인다고 하길래." "거기에 가고 싶었나요?" "아뇨. 왠지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남자친구도 권하고,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어서." 여자는 왠지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까 박스석에 있었을 때처럼 기분 나쁜,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콤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운동을 끝내고 소파에 몸을 기댔을 때의 기분 좋은, 휴식의 달콤함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나른함이었다. 그런 기분 좋은 나른함 가운데,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군가요? 그 사람이 누구길래 꺼림직한 기분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었죠? 그리고, 왜 남자친구는 그렇게 권했을까요?" "그건…, 다 그 사람 때문이에요. 제가 그 사람이 보고 싶다고 말해서 남자친구가 강력하게 가자고 했거든요." 여자는 나른한 기분 가운데 자신이 동창회에서 보고 싶던 사람을 떠올렸다. 알게된 건 그 때 같은 반이었기 때무닝었다. 처음 봤을 때, 3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전혀 얼굴조차 못봤다는 것이 괜히 신경쓰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반에서 필사적으로 친해지려고, 하지만 이제까지 말도 섞지 않던 아이들과 같은 반이 된 그 사람이 겉도는 것이 보기 싫었다. 생각에 잠긴 여자를 다시 일깨우듯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하고 친했나봐요?" "…잘, 모르겠어요. 제 입장에서는 그냥 친구였거든요. 졸업하기 전에는 조금 서먹서먹했고요."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음…그 사람도 친구였다고 생각해요. 그냥 좋은 친구." "…좋은 사이였네요." 한 받자 늦은 승무원의 말에 여자는 나른한 기분을 잠시 떨치고 승무원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부드럽고 차분한 말투로 여자의 기억을 끌어오던 그가 잠시나마 말의 박자가 늦었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승무원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있어 입가의 미소만 겨우 보이고 있었다.여자의 시선을 느낀 듯 승무원이 여자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 그 쪽이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말한 사람하고 비슷한 사람 알고 계신가요?" "설마요. 저는 손님 얼굴 오늘 처음 보는걸요. 그런데 어떻게 손님 친구 분을 알겠어요?" 너무나 당연한 승무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한동안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지만 계속 말을 섞다보니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얼굴이라는 생각도 드는 데다가 어렴풋하게 친근감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가까이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어 여자가 잠시 머뭇거리자, 승무원이 입을 열었다. "그럼, 손님이 기차를 타시게 된 원인을 알아냈으니, 바로 전으로 돌아갈까요." "네?" "어느 역에서 기차를 타시려고 했죠?" "당연히 부산역이죠." "누구랑요?" "남자친구하고요." "몇 시 열차죠?" "그게……." 순간 여자는 멍해졌다. 역 대합실에서 남자친구와 열차를 기다리던 것을 어렴풋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지만, 몇 시 열차이기에 자신과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이 안나요." "그럼 조금 질문을 바꿀까요? 어디 행 열차였죠?" "그거야…음…, 서울, 서울이요." "몇 시 서울행 열차죠?" "시간, 시간…, 아, 정말….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여자는 답답한 듯 중얼거렸다. 그런 여자를 보며 승무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건 바로 손님이 이 사촌행 열차를 타시게 된 이유라서 그렇습니다." "네?" "손님, 사촌이라는 지역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음…, 아뇨, 없어요." "저도 이 열차에서 일하게 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해요? 제가 모르는 지명은 많다구요." 여자가 당돌한 어조로 묻자 승무원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식당차의 문을 열며 손짓했다.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관람칸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드리지요." 관람칸으로 온 여자는 망연자실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한국을 떠난 지 2년 남짓된 자신이라도 알 수 있었다. 이런 곳은 지구상에 없다는 것을. 하얀 안개가 온통 열차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마치 말라죽은 것처럼 보이는 검은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체 이곳저곳에 뿌리박고 있었다. 게다가 열차가 지나가는 토양은 검붉은 색도 아닌, 핏빛의 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이질적인 것은 바로 철도 옆을 흐르는 강이었다. 회색의 음울한 빛을 띈 강에는 사람의 얼굴 모양의 물결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러나 승무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여자를 홀깃 보더니 말을 이었다. "사촌은 이 열차에 탄 승객들 중 손님과 같이 깨어나는 분들을 위한 지명입니다. 손님이야 제가 일부러 잠을 깨워드리긴 했습니다만." "사촌이……, 어딘데요? "죽을 사死에, 마을 촌村자를 쓰는 곳. 흔히 말하길 저승이라 불리는 곳이죠." 그 말에 여자는 망연한 얼굴로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은 건가요?" "아뇨. 이 열차가 사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죽은 게 아닙니다. 다만 곧 죽을 운명이지요." "제가, 왜요?" "열차 사고입니다. 이 열차는 열차 사고로 죽은 자들을 싣고 다니는 차죠."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전 몇 분 전만 하더라도 남자친구랑 같이 있었다고요! 장난치지 말라구요!!"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여자를 승무원은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열렸다. "한국에서 이런 박스석 열차를 본 적 있습니까?" "그거야 새로 만들었겠죠!!" "손님 말고는 다들 잠들어 있는게 이상하지 않던가요?" "밤이 늦었으니까요!" "10시 30분, 서울행 열차. 막자 바로 전 열차." 흥분해서 소리지르던 여자의 말을 승무원은 냉정하게 받았다. 승무원의 말을 듣는 순간 여자는 머릿속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기억에 순간 몸을 휘청였다. 그러나 승무원은 여자를 한 번 홀깃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저야 손님이 왜 온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 서울행 열차 때문이지요. 다만 그 열차를 탄 이유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죠." "말도 안돼. 이건 꿈이야…." "깨고 나면 꿈이라고 느끼겠지만, 죽고 도착하면 이게 사실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죠. 뭐, 몇 분 차이도 안나니까 별로 상관 없겠지만." 승무원의 무심한 말에 여자는 발끈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잠시 후 한숨을 푹 쉬었다. "난 죽나요?" "네." "그럼, 날 다시 재워줄 수 있어요?" "호오, 어째서죠?" "옛날에 어디선가 읽었던 적이 있어요. 몽중몽夢中夢은 곧 현실이라고. 다시 재워주면 현실로 돌아가겠죠?" "돌아가면 어차피 기억도 못할텐데요." "상관 없어요. 어차피 죽을거라면 남자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요. 소중한 사람과." "후후후, 낭만적이군요." 승무원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여자는 한숨을 쉬며 난간에 기댔다. "후우, 이렇게 젊은 나이에 갈 줄이야." "누가 태워준데요?" "네?" 장난끼어린 승무원의 말에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까지 무심했던, 혹은 냉소적이던 승무원이 장난어린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보고 있었다. 승무원은 키득 웃으며, 그러나 말 내용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게 여자에게 말했다. "잘 들어요. 이 난간에서 뛰어내리면 바로 현실로 돌아갈거에요. 그럼 10시 반 행이 아니라 반드시 12시 30분, 서울행 막차로 바로 바꿔타요. 알겠죠?" "하, 하지만 기억 못한다고…." "그거야 잠드니까 그렇죠. 수많은 꿈들 중에 이 꿈만 기억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난간에서 뛰어내리면 바로 깨니까 기억할 수 있을 거에요." 여자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것을 느꼈다. 승무원도 그것을 느낀 듯 모자를 한 손으로 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여자의 눈에는 중얼거리는 승무원의 모습이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려져 보였다. "젠장, 벌써 알아차렸나." "왜, 저 살려주세요? 저 죽는다면서요?" "죽고 싶어요?" 의아한 듯이 물어보는 승무원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죽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옛날 이야기에 죽은 사람 함부로 살려내면 벌 받는다고 들었어요." "네, 맞아요. 저 짤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살고 싶잖아요?" 승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는요?"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으니까요." "네?" "그나저나 시간 없어요. 차장이 알아차린 것 같으니까, 뛰어내려요. 지금!" 의아한 듯이 묻는 여자를 승무원은 억지로 떠밀어 난간 위에 서게 했다. 여자가 다급하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승무원이 더 빠르게 잡고 있던 여자의 손을 놓았다. 그 순간, 맹렬한 바람과 함께 승무원의 모자가 날아갔다. "친구로 생각해줘서 고마워. 나, 잘 있다고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 강렬한 바람에 눈을 재대로 뜰 수 없었지만, 여자는 승무원의 웃음띈 얼굴이 낯이 익다는 생각과 함께 난간에서 떨어졌다. "읏!" "응? 왜 그래? 악몽이라도 꿨어?"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있던 남자친구가 걱정스럽게 묻자 여자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애써 웃어보였다. "아니야. 그냥, 꿈이 좀 특이해서."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보다. 그러니까 좀 여유있게 가자니까." "그럴까……?" 남자친구가 웃으며 말을 건내자 여자는 말끝을 흐리며 남자친구를 바라보았다. 남자친구는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빨리 가자고 한 사람이 이제와서 왜 이래? 표 바꿀까? 피곤해?" "응…. 아무래도 좀 무리했나봐. 조금 여유있게 가자. 응? 미안해." "아니야. 나야 좋지 뭐. 여기서 기다려." 남자친구가 표를 바꾸러 매표소로 가자 여자는 참아왔던 한숨을 쉬었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게다가 안부 전해달라니. 낯익은 얼굴의 그 승무원. 그 승무원이 말한 내용과 지금도 기억나는 열차 밖 풍경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에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기분이 찜찜했다. 여자는 다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누굴까? 왜 낯이 익지…?" 어느 호프집. 꽤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쪽은 술을 마시고, 다른 한 쪽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을 흔들었다. "연아! 여기야!" "은재니? 오랜만이다~." 손을 흔든 삶과 그 사람을 알아본 여자는 반갑다는 듯 손을 마주잡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도 여자를 알아본 듯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여자에게 인사를 건냈고, 여자 역시 반가운 듯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여자가 자리에 앉아, 자리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연이야." "대순이니? 오랜만이다야. 잘 지냈어?" "뭐, 나야, 흔히 말하는 연구원이니까." 그녀 반대편에 자리잡은 남자는 픽 웃으며 쓰고 있던 안경을 밀어올렸다. 잠시 자신들의 신변잡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남자에게 물었다. "근데, 왜 정장입고 오라고 한거야?" "성묘 갈 거라서. 은재나 은환이가 이야기 안 하든?" "아니, 누구 성묘? 누구 죽었어?" "영인이 기억나?" 남자의 말에 여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기억은, 하는데…죽었어? 왜? 사고?" "자살했어. 이유는 아직도 몰라. 유서 없이 가버렸으니까." 남자는 술잔에 가득 찬 술을 비웠다. 여자는 충격받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자는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뒤 여자에게 말했다. "최근 사진이라도 먼저 볼래?" "응? 아아, 응." "여기." 남자가 사진을 건내고 다시 술을 들이켰다. 여자는 사진을 건내 받긴 했으니, 충격을 받은 듯 사진을 보지도 않고 그녀 역시 술을 마셨다. 여자가 빈 잔을 내려놓자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그나저나 열차로 왔다고?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네." "응, 기묘한 꿈을 꾸는 바람에 살았어." "기묘한 꿈?" 남자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여자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촌행 열차, 승무원, 그리고 그 꿈 덕분에 사고가 난 열차를 피할 수 있었던 일. 덕분에 예상보다 더 늦어졌다는 것까지. 흥미롭다는 듯 듣던 남자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호, 그 승무원이 누군지는 모르고?" "응, 낯이 익었는데 말이야. 누군지---" 무심코 고개를 내려 사진으로 시선을 옮기던 여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진 속에는 꿈 속의 승무원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어붙은 여자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남자와, 남자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인가 말을 걸었지만, 여자에게 도달하지 않은 체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친구로 생각해줘서 고마워. 나, 잘 있다고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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